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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온 : [연재] 아마추어는 창의성만 바란다

사이언스 온 연재 : http://scienceon.hani.co.kr/?mid=media&category=178&document_srl=34528

[연재] 아마추어는 창의성만 바란다

00applejobs2성공한 스티브 잡스는 창의적 정신의 상징 인물이 되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내게 창의성이 있다는 생각은 남들은 모두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과 동치이다. 앞 시대를 살다 간 수 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창의성만을 기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프로’는 먼저 수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창의성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수많았던 천재들의 업적을 일이년에 이해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수학자 이인석

 

 


펜 끝으로 행성을 발견한 남자



00LeVerrier해왕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바깥쪽 궤도를 도는 행성이다. 얼음과 바위로 이뤄진 푸른빛의 이 행성은 그 색깔 때문에 바다의 신 넵튜누스의 이름이 붙었다. 태양으로부터 45억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행성은 165년마다 공전을, 368일마다 자전을 한다. 지구에서 1년은 해왕성의 하루인 셈이다. 아득히 먼 거리에 있기에 해왕성은 지구에서 관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천문학자들은 몇 번이나 이 행성을 보았지만, 멀리 떨어진 붙박이 별로만 여겼다.

 

우주의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몸을 감추고 있던 해왕성은 어느 수학자의 펜 끝에서 비로소 발견되었다. 프랑스의 수학자 위르뱅 르베리에(Urbain Le Verrier, 1811~1877)는 천왕성의 궤도에서 뉴턴 역학에 어긋난 점을 발견한다. 그는 천왕성 바깥에 다른 행성이 존재한다는 추측을 하고 그 궤도를 계산해낸다. 르베리에는 자신의 계산 결과를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갈레( Johann Gottfried Galle, 1812~1910)에게 편지로 부쳤다. 1846년 9월 23일, 갈레는 르베리에가 예측한 그 행성을 관측한다. 이 발견은 르베리에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고, 그는 “펜 끝으로 행성을 발견한 남자”라 불리게 되었다.


해왕성 발견 몇 년 후, 르베리에는 또 다른 행성을 ‘발견’한다. 이번에는 태양계의 가장 바깥쪽이 아닌 가장 안쪽이었다. 천왕성의 궤도와 마찬가지로 수성의 궤도에도 똑같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르베리에는 이번에도 태양과 수성 사이에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조금 성급하게도 그는 이 행성에 불의 신 불카누스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천문학자들이 아무리 하늘을 뒤져보아도 르베리에가 예측한 그 행성을 찾을 수 없었다. 불카누스를 보았다는 주장이 종종 나왔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르베리에는 죽을 때까지 불카누스의 존재를 믿었지만 결국 불카누스는 발견되지 않았다. 수성의 이상한 움직임은 르베리에가 죽고 38년이 지나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설명되었다. 불카누스는 없었다. 수성의 궤도가 뉴턴 역학에서 어긋난 것이 아니라, 뉴턴 역학이 수성의 궤도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 왜 못 만드느냐?"



00apple2우리는 창의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창의성(creativity)은 19세기까지 거의 쓰이지 않던 말이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에서 ‘창의성’은 100만번에 한 번꼴로 나오는 단어였다. 같은 시기에 ‘성실(sincerity)’이라는 말은 ‘창의성’보다 800배나 자주 쓰였다. 21세기에 이르자 ‘창의성’이라는 말은 60년 전보다 1000배, ‘성실’보다도 3배는 자주 쓰인다.1)


창의성이란 새롭고 유용한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능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창의성’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누군가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그 이유로 그 사람이 창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뭔가 외국에서 만든 물건이 유행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런 것 왜 못 만드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 창의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매우 그럴 듯하다. 하지만 창의성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라는 뜻을 새겨본다면, 결국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로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셈이다.


게다가 이런 설명은 별로 설득력도 없다. 아이폰이 큰 인기를 끌자 어떤 사람들은 미국은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을 하기 때문에 아이폰을 만들 수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미국 기업들 중에서도 아이폰에 비할만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는 하나도 없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무너진 노키아와 R I M은 교육 환경 좋기로 소문난 핀란드와 캐나다 회사다. 결국 결과에 원인을 끌어다 붙이는 것 뿐이다.


사실 아이폰을 만들어낸 애플도 한때는 8비트 개인용 컴퓨터로 큰 인기를 끌었다가 IBM 호환 PC가 등장한 이후로는 오랫동안 내리막길을 걸었던 회사다. 사람들은 그저 누가 성공하면 그제서야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하고, 어쩌다 실패를 하면 모진 비난을 한다. 경영학자 필 로젠츠바이크(Phil Rosenzweig)는 똑같은 기업이 똑같은 리더십 아래서 똑같은 전략을 똑같이 실행하더라도 긴 시간 속에서 실적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기 마련인데, 단지 실적이 좋은 해에는 강력한 리더십과 훌륭한 전략을 잘 실행한 기업으로 칭찬을 받는 반면 실적이 나쁜 해에는 무능한 리더십과 나쁜 전략을 엉망진창으로 실행했다고 비난 받는다고 지적한다.2)


이러한 평가가 결코 공정할 수 없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르베리에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천왕성에 대한 르베리에의 예측과 불카누스에 대한 르베리에의 예측에는 사실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하지만 르베리에는 천왕성에 대해서는 옳았고 불카누스에 대해서는 틀렸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하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창의성의 조건



00creativity창의성이라는 개념에는 원래 결과론적인 측면이 있다. 비슷한 개념인 ‘지능’과 비교해보자. 지능은 복잡한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가 복잡하다’라는 것은 문제를 풀기 전에 이미 주어진 조건이다. 또, 지능이 높은 사람은 한 번에 많은 정보를 빠르게 다룰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능의 경우, 이것이 발휘되는 조건과 발휘되는 과정의 특징이 분명하다. 반면에 창의성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능력인데, ‘결과가 새롭다’라는 것은 문제를 풀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이나 집단의 특성으로서 창의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지능의 경우처럼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할 문제의 조건이나 창의적인 사고 과정의 특징을 분명히 알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창의성이 발휘되어야 할 문제의 조건에 대해 알아보자.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문제가 있다. 잘 정의된 문제(well-defined problem)와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ill-defined problem)이다. 잘 정의된 문제란 조건과 목표, 그리고 문제를 풀어가는 각 단계가 명확히 주어진 문제를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벽돌의 부피를 구하는 것은 잘 정의된 문제이지만, 벽돌로 할 수있는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하는 것은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이다. 단순화해 말하자면 잘 정의된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지능이고,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이 창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 때문에 지능과 달리 창의성은 측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잘 정의된 문제는 답이 확실하기 때문에 잘 푼다, 못 푼다를 가리기가 쉽다. 그리고 지능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분하기도 비교적 간단하다. 잘 정의된 문제를 여러 가지 주고 잘 해결하는지 보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의성의 경우에는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답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답이 더 좋은 답인지 가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창의성에 대한 평가는 주관이 크게 개입할 수 밖에 없다. 예술가나 과학자 중에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다가 후세에야 재발견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생각을 품고 있으면



00questionmark사람들 사이의 창의성을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사람들이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를 풀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는 관찰할 수 있다. 영국의 심리학자 그레이엄 왈라스(Graham Wallas, 1858~1932)는 사람들이 문제를 풀 때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했다.3) 그 첫 단계는 준비(preparation)이다. 준비 단계는 논리와 추론으로 답을 찾는다. 간단한 문제들은 이 단계에서 바로 답을 발견할 수 있다.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나 잘 정의되었더라도 복잡한 문제의 경우에는 다음 단계인 부화(incubation)와 통찰(insight)로 이어진다. 마지막 단계는 확인(verification)으로서 말 그대로 찾아낸 답이 정말로 맞는 답인지 확인하는 단계다.


값싼 목걸이 문제


그렇다면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를 풀 때 거쳐가기 마련인 부화와 통찰은 무엇일까? 우선 부화에 대해 알아보자. 제넷 실베이라(Jeanette Silveira)는 실험참여자들에게 ‘값싼 목걸이 문제(cheap-necklace problem)’라는 간단한 퍼즐을 주고 풀게 했다. 퍼즐의 내용은 이렇다. “3개의 고리로 이뤄진 사슬이 4개 있다(그림 왼쪽). 고리를 하나 푸는데 2센트, 채우는데 3센트가 든다. 15센트 안으로 4개의 사슬을 이어 12개의 고리로 만들어진 목걸이(그림 오른쪽)를 만들어라.”


실험참여자들은 30분 동안 이 문제를 풀었는데, 55%만 정답을 알아냈다. 다른 실험참여자들에게는 똑같이 30분을 주었지만 대신 중간에 휴식 시간을 두었다. 휴식 시간에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하도록 다른 활동을 시켰다. 그런데 한 문제만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사람들보다 이렇게 중간에 다른 일을 한 사람들이 문제를 더 잘 풀었다. 게다가 다른 일을 한 시간이 길 수록 정답률은 더 높아졌다. 휴식 시간이 30분인 경우 정답률은 64%였는데, 4시간으로 늘리자 85%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안 풀리던 문제가 다른 일을 하다가 다시 보면 풀리는 현상을 마치 새가 알을 오래 품고 있어야 새끼가 태어나는 듯하다고 해서 ‘부화’라고 한다. 시험을 볼 때도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다른 문제를 먼저 푸는 편이 나은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면 부화 효과 때문에 더 잘 풀린다. 여담이지만 새가 알을 품는 것은 ‘포란(抱卵)’이고, ‘부화(孵化)’는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므로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래동안 써서 굳어진 용어이므로 여기서는 부화라고 하자.


00incubation2어떤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이유 중에는 지식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풀려고 시도하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값싼 목걸이 문제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슬을 하나씩 이어서 목걸이를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사슬을 하나 이을 때마다 고리를 한 번 풀고 채워야 하기 때문에 5센트가 들어서 네 사슬을 모두 이으려면 20센트가 든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해도 값싼 목걸이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런데 한참 동안 다른 일을 하다보면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잊게 돼서 다시 문제를 풀려고 하면 새로운 시각으로 풀 수 있게 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 값싼 목걸이 문제의 경우 정답은 단순해서 힌트 하나만 주면 쉽게 풀 수 있다.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우연히 힌트가 될 만한 것을 보거나 들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일을 하는 중에도 이 문제가 떠올라서 짬짬이 생각을 해서 결과적으로는 더 오랫동안 생각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화는 어느 한 가지 원인이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기보다는 이런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부화 효과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든지 부화 효과를 높이는 데 두 가지 변수가 중요하다. 하나는 준비에 들인 노력이다. 어쨌든 처음에는 문제를 풀어보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나중에 다시 풀 때도 잘 풀릴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는 실베이라의 실험에서도 그랫듯이 오랫동안 다른 일을 하면 원래 문제를 다시 풀 때 풀릴 가능성이 크다. 결국 문제를 직접 풀려고 노력을 하든 아니면 풀지 않고 다른 일을 하든 시간을 많이 들일 수록 풀릴 가능성이 더 커지는 셈이다.


그건 그렇고 값싼 목걸이 문제의 답은 이렇다. 사슬 하나를 모두 풀어서 열린 고리 3개를 만든다. 여기까지 6센트가 든다. 그리고 이 고리들로 나머지 사슬 3개를 연결한다. 여기에 9센트가 들어서 모두 15센트로 목걸이를 만들 수 있다. ( 2면으로 이어짐 →)

 

 

 

(→ 1면에서 이어짐 )

00incubation알을 품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새끼는 알에서 깨어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정용 기자

 

 

‘아하!’



00thought부화의 다음 단계는 통찰이다. 보통 통찰이라고 하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말하는 통찰은 의미가 조금 다르다. 문제 해결에서 통찰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문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를 “아하 경험(aha experience)"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전혀 모를 듯하던 문제가 갑자기 ‘아하!’ 하고 해결책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하 경험”의 예로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시라쿠사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왕관을 부수지 않고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은이 섞여있는지 알아내라는 요청을 받는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던 와중에 해결책을 깨닫고 “유레카!”(‘발견했다’라는 뜻)를 외치며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뛰쳐나왔다고 한다. 금과 은은 비중이 달라서 같은 무게라면 은이 부피가 더 크다. 따라서 은이 섞은 왕관을 물로 가득찬 수조에 담그면 똑같은 무게의 금을 수조에 담글 때보다 물이 더 많이 넘친다.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과학적 발견이 이런 식으로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것처럼 흔히 묘사하곤 한다. 추리물들에서도 주인공은 계속 헛다리만 짚다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수수께끼는 풀렸다”라고 외친다. 대단한 과학적 발견이나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일은 아니더라도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번쩍하고 떠오르거나 이해되지 않던 내용이 어느 순간 이해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 쯤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도 결국은 어느 한 순간에 풀린다고 생각하고, 창의적 사고에서도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퉁이를 돌 때



00snail정확히 말하면 통찰은 답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기분(feeling of knowing)”이 빠르게 증가하는 것이다. 보통 간단한 문제의 경우에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아는 기분이 천천히 증가한다. 예를 들어 85143 + 75296 같은 덧셈을 한다고 하면 조금 귀찮기는 해도 문제가 풀려나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문제의 경우 문제를 풀어가면서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값싼 목걸이 문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사슬을 하나씩 이어나가면 답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이 보이지만, 사슬을 모두 잇고 목걸이를 채우려는 순간 갑자기 막혀 버린다. 이런 문제는 답을 향해 차근 차근 다가가는 방식으로는 풀 수 없다. 오히려 멀쩡한 사슬을 풀어서 답으로부터 잠시 멀어져야 한다. 일단 이렇게 답으로 멀어지고 나면, 갑자기 문제는 세 개의 사슬을 세 개의 고리로 연결하는 간단한 문제가 된다. 마치 낯선 곳에서 길을 헤매다가 어느 모퉁이를 돌아서니 찾던 장소가 눈 앞에 보이는 것과 같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그 모퉁이 뒤에 찾던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통찰의 순간은 그 모퉁이를 발견한 순간이 아니라 그 모퉁이를 돌아서 찾던 장소가 눈 앞에 보일 때 온다. 실제로 사람들은 통찰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문제를 풀 열쇠를 알고 있다. 다만 그 열쇠가 맞는 열쇠인지 아닌지 알지 못할 뿐이다.

 

 

답은 이미 알고 있다



00questionmark인지과학의 창시자 중에 한 명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1916~2001)은 사람들이 통찰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 문제를 풀 열쇠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4) 그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주었다. “아래 그림처럼 가로 8칸, 세로 8칸인 눈금이 있다. 왼쪽 위와 오른쪽 아래 끝 칸이 잘려서 모두 62칸이다. 두 칸 크기의 블록 31개를 눈금 위에 얹어서 눈금을 모두 덮어라.”


잘린 눈금 문제


언뜻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 문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것은 문제를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눈금을 아래 그림처럼 체크 무늬로 칠해보면 검은 칸이 32개, 흰 칸이 30개가 된다. 두 칸짜리 블록을 눈금에 올리면 반드시 검은 칸 하나와 흰 칸 하나를 동시에 덮는 홀짝성(parity)이 있다. 그럼데 검은 칸이 흰 칸보다 많기 때문에 블록을 어떻게 덮어도 검은 칸이 2개가 남는다. 그리고 이 2개의 검은 칸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두 칸짜리 블록으로는 결코 덮을 수 없다. 따라서 31개의 불록으로 눈금을 모두 덮기는 불가능하다.


체크 무늬로 칠한 잘린 눈금 문제


두 칸짜리 블록은 반드시 검은 칸 하나와 흰 칸 하나를 덮어야 한다는 홀짝성은 이 문제를 푸는 열쇠이자 문제의 답으로 가는 모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홀짝성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풀이 시간의 77%를 소모했다. 그동안 이 학생들은 블록을 이리 저리 눈금 위에 놓아가며 31개의 블록으로 눈금을 덮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다. 학생들이 이 홀짝성을 이용해서 이 문제는 풀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아주 순식간이어서 풀이 시간의 3% 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이 홀짝성을 발견한 시점부터 홀짝성을 이용해서 문제가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까지 풀이 시간의 20%를 허비하고 있었다. 이 시간동안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학생들은 홀짝성을 발견하고도 이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눈치채지 못했다. 홀짝성을 발견하고도 블록으로 눈금을 덮는 방법을 찾는 데 풀이 시간의 6% 정도를 더 썼다. 그리고는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는 데 풀이 시간의 7% 정도를 썼다. 홀짝성을 눈여겨 본 것은 풀이 시간의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왜 학생들은 문제를 푸는 열쇠를 가지고서도 자신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홀짝성이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사실은 홀짝성을 이용해서 문제를 풀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열쇠는 자물쇠에 넣어보기 전에는 맞는 열쇠라는 사실을 알 수 없고,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그 모퉁이 뒤에 찾던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값싼 목걸이 문제와 잘린 눈금 문제는 모두 잘 정의된 문제들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들은 주어진 조건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와 비슷한 점이 있다. 값싼 목걸이 문제는 사슬 4개를 연결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슬 3개를 연결하는 문제로 생각하면 간단하고, 잘린 눈금 문제는 눈금에 숨겨진 홀짝성을 알아내면 쉽다.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는 문제 자체의 조건이나 목표, 풀어가는 단계들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푸는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새롭고 유용한 답을 내놓을 수도 있고 낡고 쓸모 없는 답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부화와 통찰은 마치 이런 새로운 관점이 생각지도 않았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값싼 목걸이 문제와 잘린 눈금 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문제를 오래 품고 있어야 부화 효과도 커지고, 통찰은 갑자기 답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문제의 열쇠가 바로 그 문제의 열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경험일 뿐이다.

 

 

아마추어는 창의성만 기대한다



00hand흔히 창의성을 키운다면서 과도하게 새로운 발상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새로운 발상도 중요하고, 호기심이나 다양한 시도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창의적 사고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의성이란 새로울 뿐만 아니라 유용하기도 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기 때문이다. 새롭기만 하고 쓸모 없는 결과라면 창의적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창의성에서 발상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고 있는 반면에, 지식과 노력의 가치는 전반적으로 경시되고 있다. 잘 정의된 문제이건 잘 정의되지 않은 문제이건, 기초적인 지식과 기술을 쌓고 오랜 시간 노력해야 잘 풀 수 있다. 와전된 이야기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공부도 못하는 엉뚱한 학생이었고 평범한 특허청 직원이었다가 기발한 발상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고등학교 성적표는 A로 가득하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오랫동안 연구에 매진했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 중의 절반은 노벨상을 받은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남들보다 2배는 많은 논문을 써냈다. 그들이 평균적으로 20대 중반에 박사학위를 받아서 30세 후반 무렵에야 노벨상에 해당하는 업적을 이뤄냈다.5)


수학자 이인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 창의성이 있다는 생각은 남들은 모두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과 동치이다. 앞 시대를 살다 간 수 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창의성만을 기대하는 사람을 우리는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프로'는 먼저 수많은 천재들의 업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창의성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리고 수많았던 천재들의 업적을 일이년에 이해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6)

 

 

1) http://books.google.com/ngrams/graph?content=creativity%2Csincerity&year_start=1940&year_end=2008&corpus=0&smoothing=0

2) Rosenzweig, P. (2007). The Halo Effect. New York, NY: Free Press.

3) Wallas, G. (1926). The Art of Thought. New York, NY: Harcourt, Brace.

4) Kaplan, C. A., & Simon, H. A. (1990). In search of insight. Cognitive Psychology, 22, 374-419.

5) Zuckerman, H. (1977). Scientific Elite: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 New York, NY: Free Press.

6) 이인석 (2005). 선형대수와 군: 학부 대수학 강의 1.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