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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닝 에세이/논리적사고 관련

여기 상태’와 ‘들뜬 상태’사이에서

선생님 페이스북 글을 복사에서 올립니다. 우리말길을 이해하려면 이걸 먼저 읽을 필요성이 있어요.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7193


여기 상태’와 ‘들뜬 상태’사이에서
學而思
2013년 05월 07일 (화) 12:23:33김명석 국민대 교양과정부·철학  editor@kyosu.net

고등학생 시절 물리학 참고서에서 ‘기저상태’와 ‘여기 상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른 참고서에서 이 단어는 ‘바닥 상태’와 ‘들뜬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는 읽자마자 그 뜻을 곧장 알 수 있었다. 그 시절 두 가지 용어가 교과서와 참고서에 섞여 쓰였고, 결국 후자의 용어들이 한국물리학회의 공식용어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물리학자들이 ‘바닥 상태’와 ‘들뜬 상태’를 조어해 내지 못했다면, 우리 학생들은 아직도 교과서에서 ‘기저 상태’와 ‘여기 상태’를 읽고 있을 것이며,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것이다. 대학원 유럽철학 세미나 시간에 ‘소격화’라는 낱말을 접했을 때, 나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말을 처음 옮긴 사람은 왜 ‘거리두기’나 ‘떨어져 보기’또는 ‘낯설게 하기’라 옮기지 않았을까?

『용비어천가』의 제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海東괯龍이 나시어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하시니.”국내 학자들이 논문에서 쓰는 방식대로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해동의 육룡이 나시어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십니다.”이 문장과 다음 문장을 견줘보라. “릴렉스한 위크엔드에는「섹스엔더시티」의 캐리가 된 듯, 홈메이드 베이크된 베이글에 까망베르 치즈 곁들인 샐몬과 후레쉬 푸릇과 함께 딜리셔스한 브렉퍼스트를 즐겨보자.”

서양어를 한말로 옮기지 않고 한글로 표기만 하는 글쓰기 방식을‘보그체’라고 한다. 보그체 문장은 한국의 철학 문헌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 평론가 김홍기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소개한다. “나의 텔로스는 리좀처럼 뻗어나가는 나의 시니피앙이 그 시니피에와 디페랑스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것을 주이상스의 대상이 되지 않게 콘트롤하는 것이다.” 나는 한자어 용어를 한말로 옮기지 않은 문장도 이런 범주의 문장으로 여긴다. 왜 한국의 학자들은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또는 “가짜 돈이 멀쩡한 돈을 쫓아낸다”라고 쓰지 않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고 쓸까.

한말 낱말들은 한반도 학자들에게 학술어로 쓰인 적이 거의 없다.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19세기말 서양어의 번역어로서 일본 한자어가 채택되는 역사를 추적했다. ‘progress’는 ‘앞으로 감’이나 ‘나아감’에서 ‘진보’, ‘전진’, ‘향상’으로 바뀌고, ‘individual’은 ‘하나’나 ‘놈’에서 ‘개인’, ‘단독’으로 바뀐다. 영한사전을 편찬하는 선교사들은 영일사전이나 영중사전을 참조했는데, 이 때 중국식 한자 번역어와 일본식 한자 번역어가 한반도에 대거 유입된다. 황 교수는“‘한 놈’ 혹은 ‘앗기는 자’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한국 개념어 연구의 한 과제”라고 말한다.

동료 학자들은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학술 담론을 형성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거의 틀리지 않다. 하지만『용비어천가』제2장에 나오는 이 놀라운 문장을 보라.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꽃이 아름답고 열매도 많습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기 때문에 냇물이 돼 마침내 바다에 이릅니다.” 이 장의 의도는 한말만으로 글월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몇 해 전, 나는 모든 배움의 바탕이라 할 수 있는 논리학을 한말 낱말을 써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우리 말길』(생각실험실 刊, 2013.4)이다. 이 책에서 ‘논리’는 ‘말길’로, ‘조건문’은 ‘이면글월’로, ‘문장연산자’는 ‘글월 바꾸개’로, ‘긍정논법’은 ‘이면 없애기’로,‘ 보편예화’는 ‘모든 없애기’로옮겼다.『 우리말길』은 기존 글쓰기 방식과 전문용어 조어 방식을 뿌리부터 바꾸려는 우리의 첫 일이다. 이제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의 단편부터 현대 철학자의 주요 논문까지 수많은 개념어를 한말 낱말로 옮기는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

25년 전 ‘여기 상태’와 ‘들뜬 상태’가 다툴 때 어린 내 지성은 ‘들뜬 상태’에 손을 들어줬다. 앞으로 ‘이성’과 ‘헤아림’이, ‘실체’와‘밑바탕’이, ‘관념’과 ‘마음그림’이 우리 마음 앞에서 다투게 될 것이다. 언젠가『용비어천가』제2장을 닮은 글월로 가득 채워진 우리말 철학 고전이 나오길 기다린다.